얼룩무늬 끈 The Adventure of the Speckled Band 1892 1883년 4월 초의 어느 날 아침, 나는 홈즈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홈즈가 정장 차림으로 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평소 늦잠꾸러기였는데, 벽난로 위의 시계는 아직 7시 15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눈을 껌벅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왓슨, 일찍 깨워서 미안하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모두 일찍 일어나야 할 운명인가 봐. 허드슨 부인이 이른 아침에 일어나야 했는데, 부인은 그 분풀이로 나를 깨웠고, 나는 자네를 깨운 거야.” “무슨 일이야? 불이라도 났어?" "아니, 의뢰인이야. 어떤 젊은 여자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찾아와서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군. 지금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젊은 여자가 이른 아침부터 런던 거리를 헤매면서 찾아왔다는 건 아주 절박한 사정 때문이겠지. 굉장히 흥미로운 사건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자네는 틀림없이 그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듣고 싶을 게 아닌가. 그래서 자네를 깨웠다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일어나야지.” 홈즈는 아무리 어려운 사건도 전문적인 조사와 예리하고 신속한 추리력으로 멋지게 해결하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큼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옷을 입고 홈즈와 같이 거실로 내려갔다. 두꺼운 베일로 얼굴을 가린 검은 옷차림의 한 여자가 우리를 보더니 창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제가 셜록 홈즈입니다. 이쪽은 내 친구이자 협력자인 왓슨 박사이니, 이 친구 앞에서도 뭐든지 망설이지 말고 얘기하셔도 됩니다. 추위에 떨고 계시는 것 같은데 좀 더 불 가까이로 오세요. 뜨거운 커피라도 한잔 드릴까요?" 홈즈가 밝은 소리로 말했다. “추워서 떠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무엇 때문이죠?" “무서워서 그래요, 홈즈 씨. 제 몸엔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닥쳐오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녀가 베일을 올렸는데 확실히 애처로울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졌고, 눈동자는 쫓기는 짐승처럼 불안에 떨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서른 정도로 보이는데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여 있고, 곧 쓰러질 것처럼 힘겨워했다. 홈즈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여자를 관찰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홈즈는 허리를 굽혀 여자의 팔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위로 했다. “모두 해결될 겁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곳까지 열차로 오셨군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아세요?" “부인의 왼쪽 장갑 속에 왕복 차표가 있어서죠.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이륜마차에 흔들리면서 진창길을 달려 역에 도착하는 것도 힘들었겠군요.” 그녀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홈즈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부인의 왼쪽 옷소매에 흙이 튄 자국이 일곱 군데나 있어요. 그것도 아직 말라붙지 않은 채로 말이죠. 팔에 흙이 튄 것은 부인이 이륜마차를 탔기 때문이고, 또한 마부 왼쪽에 앉았기 때문이니까요.” 홈즈가 싱긋 웃어 보였다. "모두 말씀대로예요. 오늘 아침 6시 전에 집을 나와 6시 20분에 레더헤드에 도착해서 첫차로 워털루 역에 왔어요. 홈즈 씨, 더 이상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러다간 곧 미쳐 버릴 거예요. 내겐 의지할 사람도 없어요. 아니, 저한테 마음 써주는 사람이 한 사람 있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해요. 홈즈 씨, 당신의 소문을 들었어요. 패린토시 부인이 곤경에 빠졌을 때 당신이 도와주셨다고 하시기에, 그분한테 이곳 주소를 알아내 찾아왔어요. 부탁이에요. 저를 이 불안에서 구해 주세요. 저를 에워싸고 있는 이 암흑 속에 한 줄기 빛이라도 들어오게 해주세요.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두 달 후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돈이 들어와요. 그때 꼭 사례를 하겠어요.” 그녀는 이미 홈즈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것 같았다. 홈즈는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려 서랍을 연 뒤 작은 수첩을 꺼냈다. “패린토시 부인.......... 아, 생각났다. 오팔 머리 장식에 관한 사건이었어. 왓슨, 이건 자네를 알기 전에 있었던 사건이야.” 홈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 다음, 다시 그녀를 향해 부드 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패린토시 부인 때와 마찬가지로 부인도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금전적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형편이 좋을 때 지불하시면 됩니다. 제게는 사건 자체가 보람이고 대가이니까 요. 자,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제 불안의 원인은 아주 막연해요. 사람들 눈에는 틀림없이 사소한 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제 약혼자까지도 저의 증상을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저를 위로할 때의 말투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하지만 홈즈 씨, 당신은 사람의 마 음속에 들어 있는 사악함을 꿰뚫어볼 줄 아는 분이라고 들었 어요. 제발 저에게 닥친 이 위험을 물리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좋아요, 어쨌든 한번 들어봅시다.” “제 이름은 헬렌 스토너예요. 지금은 의붓아버지와 함께 서리 주의 서쪽 경계지역에 살고 있어요. 의붓아버지는 영국 에서 가장 유서 깊은 색슨 계 가문의 하나인 스토크 모란의 로일롯 일족 중 마지막 혈통이죠.” “그 가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홈즈가 끄덕였다. “로일롯 족은 한때 영국에서 손꼽히던 부호로 유명했죠. 서리 주의 경계를 넘어 북쪽으로는 버크셔, 서쪽으로는 햄프셔까지 가문의 영지가 이어져 있었어요. 그러던 것이 지난 세기에 연달아 4대에 걸쳐 완전히 몰락했어요. 남은 것이라고는 몇 에이커의 땅과 200년 전에 지은 낡은 저택뿐인데, 그마저도 빚쟁이들에게 담보로 잡혀 있었지요. 외아들인 제 의붓아버지의 부친은 그 집에서 가난한 귀족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어요. 이 불행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한 의붓아버지는 친척에게서 빚을 내어 학업을 마친 뒤 의학박사 학위를 따고 인도의 캘커타로 건너갔어요. 인도에는 의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의붓아버지의 병원에는 항상 환자들이 들끓었어요. | 그런데 가끔 집 안의 물건이 없어지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그만 홧김에 인도인 집사를 때려죽였어요. 결국 사형 에 처해질 위기까지 몰리다가 다행히 극형만은 면했는데, 감 옥살이를 하는 동안 우울증이 생겨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영국으로 돌아왔지요. 의사였던 저의 어머니는 인도에 주둔하는 벵골 포병대 스토너 소장과 결혼하여 쌍둥이인 저와 언니를 낳았어요. 친아 버지는 우리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우리가 두 살일 때 그림스비 로일롯 박사와 재혼했어요. | 어머니는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어요. 8년 전 크류에서 일어난 철도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의붓아버지는 런던에서 개업하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저희를 데리고 스토크 모란의 낡은 저택으로 옮겼어요. | 어머니는 1년 수입이 1,000파운드가 넘었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그 재산을 모두 의붓아버지에게 양도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저희 자매가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동안 에 한해서였죠. 언니나 제가 결혼할 경우에는 매년 일정한 액수가 저희에게 돌아오도록 유언을 남기셨어요. 어머니의 유산 덕분에 우리는 넉넉하게 생활했고, 그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웃 사람들은 스토크 모란의 로일롯 가 가장이 옛 저택으로 돌아왔다고 처음에는 크게 기뻐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의붓아버지가 난폭해졌어요. 의붓아버지는 친구를 사귀지도, 가족끼리 얘기를 하지도 않은 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따금 외출을 하면 길에서 만나는 사람을 붙들고 큰 싸움을 벌이는 거예요. 로일롯 집안의 남자들한테는 본래부터 광적일 정도로 격렬한 피가 흐르고 있는데, 의붓아버지의 경우는 오랫동안 열대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거칠어진 것 같아요. 싸움을 | 하다가 두 번이나 경찰에 끌려가는 일이 생기자, 그 후로는 마을 사람들이 의붓아버지를 보기만 해도 슬슬 피해 도망갔어요. 의붓아버지는 무섭게 힘이 센 데다 한 번 화가 나면 절대로 참지 못하거든요. 지난주에도 의붓아버지는 마을의 대장간 주인을 다리 위에서 강물로 던지며 행패를 부렸어요. 또다시 동네가 시끄러워질까봐 제가 갖고 있는 돈을 모두 털어서 겨우 막았어요. 의붓아버지의 친구라고는 떠돌이 집시들밖에 없어요. 의붓아버지는 그 떠돌이들에게 얼마 되지 않는 몇 에이커의 땅 중에서 가시덤불이 무성한 곳에 천막을 치도록 허락했어요. 그에 대한 보답인지 그들은 의붓아버지를 천막으로 초대해 음식 대접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의붓아버지도 그들과 한패가 되어 몇 주일씩 떠돌아다니기도 해요. 게다가 요즘 의붓아버지는 인도의 동물들에 푹 빠져 있어요. 그래서 인도 현지인을 통해 동물들을 들여오고 있어요. 지금 집에 있는 것은 표범과 비비 원숭이에요. 그것들이 묶이지도 않은 채 저택 안을 돌아다니자, 마을 사람들은 의붓아버지와 함께 짐승들까지 두려워하게 되었지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언니 줄리아와 저의 생활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하녀도 붙어 있지 못해서 오래전부터 집 안일을 저희들이 직접 해야 했지요. 언니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죽었는데, 지금의 나처럼 흰머리가 가득했었어요. “아, 언니는 돌아가셨군요?" "2년 전이에요. 언니의 죽음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짐작하시겠지만, 저희는 유별난 환경 때문에 같은 또 래나 비슷한 신분을 가진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여동생, 미혼의 오노리아 웨스트페일 이모가 근처에 살고 있어서, 저희들은 이따금 이모 댁에 가서 머물다 오곤 했어요. 2년 전 크리스마스 때 줄리아 언니는 그곳에 갔다가, 명령 대기 중인 한 해병대 소령을 만나 약혼했어요. 언니는 돌아와서 의붓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의붓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혼식을 2주일 남겨놓고서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고, 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서 쿠션에 머리를 기댄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홈즈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때의 상황을 되도록 정확하게 설명해 보세요.” “네, 그 무서운 사건에 대해서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택은 몹시 낡아서 지금은 건물 하나만 쓰고 있어요. 그 건물 1층은 모두 침실인데, 거물 중앙에 있어요. 침실은 건물 중앙에 가까운 쪽에서부터 차례로 의언니, 그다음 방을 제가 쓰고 있었지요. 세 개의 침실은 벽으로 가려져 있어 왕래할 수 없지만, 문은 모두 같은 복도에 있어요. 아시겠어요?” “네, 계속 말씀하세요.” “세 방 모두 창 밖은 잔디예요. 그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의붓아버지는 일찍 침실에 들었지만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의붓아버지가 즐기는 인도 담배의 강한 냄새에 언니가 질색을 했으니까요. 언니는 담배 냄새를 피해 제 방으로 와서, 보름 앞으로 닥쳐온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열한 시쯤 되었을 때, 언니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어요. ‘헬렌, 밤에 휘파람 소리 들었니?’ ‘아니.’ ‘네가 자면서 휘파람을 불 리도 없고…….’ ‘언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런데 갑자기 휘파람 소리라니, 뭐야?’ ‘며칠 전부터 매일 새벽 3시쯤이 되면 항상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 나는 잠귀가 밝아서 그 소리에 잠이 깨고는 해.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지만...... 옆방 같기도 하고, 잔디밭 같기도 해. 그래서 너도 들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난 못 들었어. 하지만 틀림없이 그 기분 나쁜 집시들이 정 원 어디에선가 부는 걸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원 쪽에서 부는 거라면 네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난 언니보다 깊이 잠들잖아.' 하긴....... 어쨌든 중요한 일은 아니야.' 언니는 미소를 지으며 내 방을 나갔어요. 그리고 곧 언니 방에 열쇠 채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두 분 다 밤마다 방문을 잠그고 자나요?" 홈즈가 물었다. “네, 언제나 그렇게 했어요.” "왜죠?” “의붓아버지가 기르는 표범과 비비 원숭이 때문이에요. 방문을 잠그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거든요.” “그렇겠군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죠?" “저는 그날 밤, 잠이 들지 못했어요.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거든요. 아까도 말했듯이, 언니와 나는 쌍둥이에요. 그러한 관계에 있는 두 영혼이 얼마나 미묘하게 반응하는지는 잘 아시리라고 생각해요. 그날 밤은 폭풍이 심하게 몰아쳤고, 거센 빗줄기가 계속 창문을 두드려댔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는 소리 틈새로 여자의 무시무시한 비명이 들렸는데, 틀림없이 언니였어요. 저는 침대에서 일어나 급히 숄을 두르고 복도로 뛰어나갔어요. 문을 연 순간 언니가 말하던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무거운 금속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도 들렸던 것 같아요. 내가 언니 침실 앞으로 가자, 방문의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나고 천천히 문이 열렸어요. 저는 무엇이 나올지 몰라 두려움에 떨면서 방문을 지켜보고 서 있었는데, 복도에 켜져 있는 램프의 불빛을 받으며 언니가 나왔어요. 언니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했고, 두 손은 구조를 청하듯 앞으로 내밀고 있었어요. 그리고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있었지요. 제가 달려가서 언니를 두 팔로 안자, 언니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어요. 그러더니 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몸부림쳤고, 손발도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어요. 처음에는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언니 위로 몸을 굽히니까, 그때서야 '오! 헬렌! 밴드(band)가! 얼룩무늬 밴드가!' 하고 겁먹은 소리로 말했어요. 그 소리는 평생 못 잊을 거예요. 그리고 언니는 손가락으로 계속 의붓아버지 침실 쪽을 가리키면서 뭔가를 말하려다가, 다시 경련이 일어나자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제가 큰 소리로 의붓아버지를 불렀는데, 마침 의붓아버지가 가운을 입고 방에서 나오고 있는 중이었어요. 의붓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언니의 입에 브랜디를 흘려 넣기도 하고, 의사를 불러오라고 마을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어요. 하지만 언나는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기력을 잃더니 결국 숨을 멈췄어요. 이것이 가엾은 언니의 끔찍한 최후였어요." “잠깐! 휘파람 소리와 금속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건 틀림없습니까?" “검시관도 제게 그걸 물어봤었어요. 저는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는 밤이었고, 집이 낡아" 서 자주 삐거덕거렸기 때문에 착각일지도 모르겠어요.” “언니는 옷을 입고 있었나요?" “잠옷 바람이었어요. 그리고 오른손에는 불을 켰던 성냥을, 왼손엔 성냥갑을 쥐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언니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성냥을 켜서 주위를 살펴보았군요. 이건 중요한 점이에요. 검시관은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의붓아버지의 포악한 성격이 인근에 널리 알려졌던 터라 검시관은 특히 주의 깊게 조사했어요. 하지만 끝내 사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어요. 문이 안에서 걸려 있었다는 것은 제가 알고 있었고, 창문에는 굵은 쇠막대가 달린 구식 덧문이 있어서 밤마다 그것으로 문단속을 했거든요. 벽도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이상이 없었고, 바닥도 마찬가지였어요. 굴뚝이 큰 편이지만 굵은 못이 네 개나 박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때 언니는 방 안에 혼자 있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게다가 언니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어요.” "독살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의사들이 조사했지만 확실한 건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헬렌 양은 언니가 무엇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합니까?” “감당할 수 없는 공포 때문에 신경에 큰 쇼크를 받아 죽었다고 생각해요. 무엇이 그리 무서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정원에 집시가 있었나요?" "네, 몇 사람은 언제나 거기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참, 언니가 말했다는 밴드...... 그 얼룩무늬 밴드에 대해서 생각나는 게 있습니까?" "만약 밴드가 끈이 아니라 사람들 무리를 뜻하는 거라면, 숲 속의 집시들을 두고 한 말일지도 몰라요. 언니가 말한 얼룩무늬란 집시가 곧잘 머리에 감고 있는 물방울무늬 손수건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언니가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헛소리를 한 것은 아닐지..........” 홈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긴 것 같아요. 어쨌든 계속해 보세요.” “그렇게 언니가 세상을 뜬 지 2년이 지났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의 생활은 정말 쓸쓸했어요. 그러다가 한 달쯤 전에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한 분으로부터 청혼을 받았어요. 퍼시 아미티지라는 분인데, 레딩에서 가까운 크레인 워터에 사는 아미티지 씨의 둘째아들이에요. 의붓아버지도 이 결혼에 반대하지 않아서 돌아오는 봄에 우리는 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그녀는 다시금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는지 숨을 깊이 내쉬 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건물의 서쪽 부분을 수리하기 시작해서 제 침실 벽에 구멍이 났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는 언니 방으로 옮겨 언니가 잠을 자던 침대에서 자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젯밤 일이에요. 잠이 오지 않아 언니가 세상을 떠날 당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밤의 정적 속에서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어요. 언니의 죽음을 예고라도 한 것 같았던 바로 그 휘파람 소리였어요. 그때 제가 느꼈던 공포가 어떠했을지 아시겠지요? 저는 벌떡 일어나 램프에 불을 켜고 살펴보았지만 방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하지 만 겁에 질려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옷을 입고 기다리다가 날이 밝자마자 몰래 집에서 빠져나와, 맞은 편에 있는 크라운 호텔로 가 이륜마차를 불러 타고 레더헤드로 가서 열차를 탔어요. 어떻게든 빨리 도움을 받아야 하겠다는 마음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방문하게 된 거예요." “정말 잘 판단했습니다. 더 하실 말씀은?" 홈즈가 물었다. "아니요, 제가 할 이야기는 이게 전부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있을 거예요. 헬렌 양은 의붓아버지를 감싸고 있어요.” "어머, 어떻게 그런 말씀을?" 홈즈는 대답 대신 그녀가 무릎에 얹어놓고 있는 손목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손목의 검은 레이스 소매 장식을 걷어 올렸다. 하얀 손목에는 엄지와 네 개의 손가락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회색 반점 다섯 개가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심하게 손찌검을 당했군요." 홈즈가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자국이 나 있는 손목을 얼른 감췄 다. “의붓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에요. 의붓아버지는 자기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르는 것 같아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홈즈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벽난로의 불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이건 아주 어려운 사건입니다. 사건을 파헤치기 전에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오늘 | 당장 스토크 모란에 간다면, 로일롯 의사 모르게 방을 조사할 수 있을까요?” 홈즈가 말했다. "다행히 의붓아버지는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 런던에 간다고 했으니 저녁때나 돌아올 거예요. 가정부가 한 명 있지만 나이도 많고 좀 미련해서, 방을 조사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거예요.” "잘됐군요. 왓슨, 자네도 함께 갈 거지?" “물론!” 홈즈는 다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가겠습니다. 헬렌 양의 오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저는 모처럼 런던에 왔으니 몇 가지 일을 본 다음, 두 시열차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좋습니다. 그럼 오후에 스토크 모란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두세 가지 간단한 일을 마쳐야겠군요. 아, 잠깐 기다렸다가 아침 식사라도 함께하지요.” “아니에요. 전 가야 해요. 걱정거리를 털어놓으니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릴게요. 그녀는 두꺼운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왓슨,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홈즈가 의자에 기대며 물었다. “매우 어둡고 으스스한 사건 같은데.” “정말 어둡고 으스스한 사건이지.” “더구나 헬렌 양이 말했듯이 바닥이나 벽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문이나 굴뚝으로도 출입할 수 없었다면..... 혼자 있던 언니가 살해됐다는 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야.” "밤마다 들려왔다는 휘파람 소리와 언니가 죽을 때 했다는 | 이상한 말은 무얼 뜻한다고 생각하나?" “글쎄, 잘 모르겠어.” “밤에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로일롯 의사와 친한 집시의 무리들, 즉 집시 밴드가 정원에 와 있었다....... 로일롯 의사는 딸의 결혼을 방해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언니가 죽을 때 밴드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헬렌 양이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지. 그 소리는 덧문을 받치고 있던 쇠막대기가 원위치에서 떨어지는 소리였는지도 몰라. 이런 사실들을 연결하다 보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잡힐 것 같아.” "그렇다면 집시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아직 모르겠어.” “헬렌 양의 설명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많아.” “그래서 오늘 스토크 모란에 가려는 거야. 정말 불가사의 | 한 일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감췄는지 확인하고 싶네. 엇! 당신 누구야?" (32:29) 홈즈가 갑자기 소리를 친 이유는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굉장히 덩치가 큰 노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 중산모자에 검은 프록코트를 입었고 무릎까지 각반을 감고 있었으며, 손에는 사냥용 채찍을 들고 있었다. 쓰고 있는 모자가 문틀 위에 가로 댄 나무에 닿을 정도로 키가 아주 큰 노인이었다. 볕에 누렇게 그을렸고 주름살이 많은 그의 커다란 얼굴에서는 온갖 사악함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노기가 가득한 움푹 팬 눈과 가늘고 높은 코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어딘지 사나운 독수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누가 홈즈야?” “내가 홈즈입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나는 스토크 모란의 그림스비 로일롯이다.” “아, 로일롯 의사시군요. 어서 앉으세요.” “그럴 필요 없어! 방금 내 딸이 다녀갔지? 여기까지 내가 미행했다. 그 애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오늘은 다른 날보다 좀 추운 것 같군요." 홈즈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딸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잖아!" 노인이 사납게 소리쳤다. “그런데도 크로커스 꽃은 잘도 핀다더군요.” 홈즈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흥, 어물쩍 넘어갈 속셈이군. 이 나쁜 놈! 네놈 소문은 전부터 들었어. 주제넘게 설치고 다닌다더군.” 홈즈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참견 잘하는 놈아!” 홈즈는 좀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경찰의 앞잡이, 홈즈!" 홈즈는 유쾌한 듯이 키들키들 웃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요. 나갈 때는 문을 꼭 닫아주십시오.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니까.” “잘 들어! 내 딸 헬렌이 여기 왔었다는 것은 네 녀석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내 두 눈으로 봤으니까. 하지만 우리 집 문제에 쓸데없이 참견할 생각은 하지 마. 날 만만히 봤다가는 큰코다칠 테니 명심하라고!" 그는 난로 곁으로 가서 부젓가락을 움켜쥐더니 볕에 그을린 커다란 두 손으로 금세 구부려 놓았다. “봤어? 괜히 참견하다가 나에게 붙잡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로일롯은 구부린 부젓가락을 난로에 던지고 나서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꽤 유쾌한 노인이군.” 홈즈가 웃으며 말했다. “저 노인만큼 덩치가 크지는 않지만 내 팔 힘도 만만치 않지.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나도 보여주었을 텐데.” 홈즈는 부젓가락을 들고 힘을 주어 원래 모양대로 펴 놓았다. “나를 경찰 앞잡이 정도로밖에 안 보다니, 좀 실례했단 생각이 들지 않나? 하지만 덕분에 이 사건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군. 헬렌 양이 미행당한 건 좀 안타깝지만 걱정할 것은 없어. 왓슨,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게. 식사 후에 나는 등기소에 들러 이 사건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오겠어.” (36:29 конец 1ч) 홈즈는 한 시간 가까이 외출했다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숫자와 메모로 배곡한 파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죽은 부인의 유언장을 보고 왔어. 투자 물건 등을 포함해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현재의 평가액을 산정해 봐야 하거든. 부인의 사망 당시 수입은 연간 1,100파운드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농산물 가격이 하락해서 | 750파운드 정도야. 그리고 딸들은 결혼하면 각자 해마다 250파운드씩 받을 권리가 있어. 그러니 한 사람이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그 노인은 적지 않은 손실을 보게 되고, 둘 다 결혼하면 그땐 그야말로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지. 내가 오전에 한 일이 헛수고가 아니었어. 그에게 딸들의 결혼을 방해할 만한 강한 동기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으니 까. 왓슨, 이렇게 되면 사태가 아주 심각하다네. 우리가 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것을 그 노인이 알았으니까. 준비가 되면 마차를 불러서 워털루 역으로 가세.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가는 게 좋겠어. 상대는 부젓가락을 구부릴 정도로 힘이 센 남자니까.” 다행히 우리는 워털루 역에서 출발하는 레더헤드 행 열차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레더헤드에 도착한 뒤 우리는 역 앞 여관에서 부른 소형 마차를 타고 서리 주의 아름다운 길을 4, 5마일 정도 달렸다.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는 맑고 깨끗한 하늘에는 양털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었다. 길가의 나무들은 막 신록의 눈을 뜨고 있었고, 스치는 공기 속에는 촉촉하게 젖은 달콤한 향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이 아름다운 봄의 징조와 우리가 이제부터 조사해야 할 기괴한 사건은 참으로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마차의 앞좌석에 앉은 홈즈는 팔짱을 끼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채 턱을 가슴에 묻고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목장 쪽을 가리켰다. “저기를 봐.” 넓은 정원이 완만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무가 차츰 많아지더니 정상에서 숲을 이루고 있었고, 우거진 가지 사이로 꽤 오래된 저택의 회색 지붕이 솟아나온 것이 보였다. "여기가 스토크 모란이오?" (1:35) “네, 그림스비 로일롯 의사의 저택입니다.” 마부가 대답했다. “지금 수리 중일 텐데, 그 현장으로 갑시다.” “저쪽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빙 돌아서 가는 것보다 여기서 내려 밭두렁 길을 따라 가는 편이 더 빠릅니다. 아, 저기 여자가 걷고 있는 길 말입니다.” 마부는 왼편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는 헬렌 양 같군. 맞아, 당신 말대로 하는 게 빠르겠소.” 마차에서 내려 요금을 치르자, 마부는 레더헤드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부에게는 우리가 건축 기사나 공사에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들처럼 보이는 게 좋겠어. 소문이 안 나도록 말이야.” 홈즈는 낮은 소리로 내게 말하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흔 들었다. "안녕하세요, 헬렌 양. 약속 시간 잘 지켰지요?" 오늘 아침의 의뢰인인 헬렌이 아주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고 있어요. 의붓아버지는 런던에 갔으니, 오후 늦게 돌아올 거예요.” 우리와 인사를 나누면서 그녀가 말했다. “영광스럽게도 이미 헬렌 양의 의붓아버지 로일롯 의사를 만났습니다.” 홈즈는 아까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자, 깜짝 놀란 그녀는 입술까지 새파래졌다. “어머! 제 뒤를 미행했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의붓아버지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돌아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오히려 로일롯 의사가 조심해야 할 겁니다. 자신보다 훨씬 영악한 남자가 노리고 있으니까요. 헬렌 양은 오늘 밤 로일롯 의사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방문을 잠그고 있어요. 그가 난폭하게 굴 것 같으면 이모 댁에 데려다 드리지요. 자, 어서 지금 그 문제의 방으로 가봅시다.” | 저택은 군데군데 이끼가 돋은 회색 석조 건물로, 한층 높은 중앙 건물에서 두 채의 건물이 게의 집게처럼 양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한쪽 건물은 창문이 널반지로 막아져있었고 지붕도 내려앉아 있어서 폐가와 다를 바 없었다. 중앙 건물 역시 낡아 있었지만, 오른쪽 건물만은 그런대로 집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 건물 창문에는 덧문도 있고, 굴뚝 두세 개에서는 푸른 연기가 솟아올라 가족이 살고 있는 곳임을 말해 주었다. 끝 쪽의 벽에 나무로 발판이 짜여져 있고 돌벽에는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우리가 거기 도착했을 때 인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홈즈는 손질이 안 된 잔디 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창문을 통해 건물 안을 세밀히 살폈다. “이것이 헬렌 양의 침실 창문이고 가운데가 언니의 방 창문, 안쪽에서 가까운 저곳이 로일롯 의사의 창문이군요.” “네, 하지만 저는 지금 가운데 방을 쓰고 있어요.” “수리하는 동안 그렇다고 했지요? 그런데 저 끝의 벽은 특 별히 수리할 필요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헬렌 양을 가운데 방에서 자게 하기 위해 로일롯 박사가 꾸며낸 구실 아닐까?" 내 말에 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7:26) “그럴듯한 이야기야. 그런데 헬렌 양, 이 좁은 건물 저쪽에 복도가 있고 그 복도에서 세 방으로 출입할 수 있다고 했지 요? 물론 복도 쪽에도 창문이 있겠죠?" “네, 있어요. 하지만 아주 작아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어요." “밤에는 두 분 모두 문을 잠갔으니까 복도에서는 침입하지 않았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잠시 방에 들어가서 덧문을 한번 닫아주시겠습니까?” 그녀가 덧문을 닫자, 홈즈는 창문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닫힌 덧문을 열어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헛수고였다. 빗장을 밀어 올리려 해도 나이프 하나 끼어 넣을 틈이 없었다. 이번에는 돋보기로 경첩을 조사했는데, 이 것은 튼튼한 철제로서 견고한 돌 벽에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이 덧문에 빗장이 끼워져 있으면, 이곳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못해. 좋아, 이번에는 방 안에 어떤 단서가 있는지 알아볼까?" 홈즈는 약간 당혹스런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옆에 있는 작은 출입구로 들어가자 회반죽을 바른 복도를 따라 침실 문 세 개가 나란히 나 있었다. 우리는 지금 헬렌이 사용하는 두 번째 방, 즉 언니 줄리아가 죽은 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시골집처럼 천장이 낮고 커다란 벽난로가 있는 작고 검소한 방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갈색 옷장, 다른 한쪽에는 하얀 커버를 씌운 침대가 있고 창문 왼쪽에는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그 밖에 가구라고는 작은 등의자 두 개와 방의 중앙에 깐 정사각형 카펫뿐이었다. 카펫 둘레에 보이는 바닥 판자와 벽의 널빤지는 벌레 먹은 갈색 참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그 색이 바랜 정도로 보아 옛날 이 집이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 홈즈는 방 한쪽 구석에 의자를 놓고 조용히 앉아서, 어떤 사소한 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위아래와 사방을 세심하게 살폈다. “저 끈은 어디로 연결되어 있지요?" 홈즈가 침대 옆에 늘어져 있는 굵은 끈을 가리켰다. 끈 끝의 술은 베개 위에 얹혀져 있었다. “가정부 방에 달린 종과 연결되어 있어요." “보기엔 새 것 같은데요." "네, 2년 전에 달았으니까요." “언니가 원했나요?” “아니에요. 언니가 사용하는 걸 들은 적이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 편이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종 끈이 필요치 않았군요. 이제 바닥을 조사하겠습니다.” 그는 배를 깔고 바닥에 엎드리더니 돋보기를 들고 앞뒤로 재빨리 움직이면서 바닥 판자의 틈새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대를 관찰하기도 하고, 벽을 따라 시선을 아래위로 훑어보기도 했다. 그런 후 홈즈는 갑자기 종 끈을 쥐더니 힘껏 잡아당겼다. “역시 소리가 나지 않는군." "울리지 않아요?” "당연하죠. 종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이거 정말 재미있군. 이것 보세요. 환기통 바로 위의 못에 매어져 있어 "어머, 정말! 이상하군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정말 이상해.” 홈즈는 줄을 당기며 말했다. “이 방에는 이상한 점이 몇 가지 더 있어요. 예를 들면, 환기구멍이 옆방으로 뚫려 있어요. 바깥 공기가 통하도록 해야 할 텐데,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목수가 있을까요?" “이 환기구멍도 뚫은 지 얼마 안 됐어요.” "이 종 끈과 같은 시기에 만들었군요.” “네, 그 무렵에 이것 말고도 간단한 공사를 몇 군데 더 했어요.” “정말 재미있는 공사였던 것 같군요. 소리가 나지 않는 종 끈, 환기가 되지 않는 환기구멍...... 그럼 헬렌 양, 이번엔 로일롯 의사의 방을 조사하고 싶은데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림스비 로일롯의 침실은 딸의 방보다 넓었지만 역시 별 꾸밈없이 검소한 방이었다. 조립식 침대, 전문 의학서적으로 꽉 찬 작은 나무 책장, 침대 옆의 안락의자, 창가에 놓인 소박한 나무 의자, 둥근 테이블, 커다란 철제 금고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홈즈는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이것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홈즈가 금고를 두드리면서 물었다. “아버지의 서류예요.” "그래요? 안을 본 적 있나요?" "몇 년 전에 한 번 봤는데, 서류가 가득 들어 있었어요.” “혹시 고양이 따위가 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설마요. 이상한 말씀을 하는군요.” "이걸 보세요.” 그는 금고 위에 있는 우유가 담겼던 작은 접시를 들었다. "아니에요. 고양이는 기르지 않아요. 표범과 비비 원숭이 뿐이에요.” "아, 그렇군요. 어쨌든 표범도 큰 고양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런 접시로 우유를 먹어서는 견디지 못할 겁니다. 한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는 나무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부분을 주의 깊게 조사했다. "고맙습니다. 대부분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일어나 돋보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14:28) "아!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있군.” 그가 가리킨 것은 개를 훈련시키는 작은 채찍이었다. 채찍은 침대 한쪽 구석에 돌돌 말린 채 걸려 있었는데, 가죽 끝 부분이 고리 형태로 되어 있었다. “왓슨,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보통 채찍 같은데, 끝을 왜 고리로 만들어 놓았지?" "아니, 보통 채찍이 아니야.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나쁜 일에 머리를 쓰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을 거야. 헬렌 양, 필요한 건 다 본 것 같습니다. 괜찮다면 이제 정원으로 나갈까요?" 조사를 마친 홈즈의 얼굴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심각하고 어두웠다. 세 사람이 정원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할 동안 나와 그녀는 홈즈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겼다. “헬렌 양. 지금부터 어떤 일이 생겨도 내 말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홈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 약속하겠어요.” “사태가 아주 긴박해서 망설일 틈이 없어요. 헬렌 양의 목숨은 내 충고를 따르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어요.” “말씀대로 하겠다고 맹세할게요." “그럼 첫째, 오늘 밤은 나와 왓슨이 당신 방에서 밤을 새울 겁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각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부터 설명하지요. 저기 보이는 것이 마을의 호텔인가요?" 그녀와 나는 놀라서 멍하니 홈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크라운 호텔이에요.” “저곳에서 당신 방의 창문이 보일까요?" "네, 보여요.” “잘됐군. 로일롯 의사가 돌아오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침실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창의 덧문을 열고 램프로 우리에게 신호를 하세요. 그런 다음 필요한 소지품을 챙겨 당신이 전에 사용하던 침실로 옮기는 겁니다. 수리 중이지만 하룻밤 정도는 지낼 수 있겠죠?" “네, 그렇게 하겠어요.” “그다음 일은 우리에게 맡기세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신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당신을 놀라게 한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겁니다.” “홈즈 씨,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녀는 홈즈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언니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 주실 수 있어요?" “증거가 더 확실해진 다음에 이야기하고 싶군요.” “하지만 저의 생각이 옳았는지 아닌지 정도는 말씀해 주실 수 있잖아요. 언니는 역시 갑작스런 공포에 휘말려서 죽은 것인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 확실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 헬렌 양. 로일롯 의사가 돌아와서 우리를 발견하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내 말대로만 하면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위험이 사라질 겁니다.” 홈즈와 나는 크라운 호텔에서 거실이 딸린 2층 방 침실을 빌렸다. 침실 창문으로 스토크 모란 저택의 가로수에 이어진 문과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이 보였다. 해가 질 무렵, 우람한 체구의 그림스비 로일롯이 자그마한 마차를 타고 소년 마부 옆에 앉아 돌 아오는 것이 보였다. 소년이 육중한 철문을 여느라 낑낑거리는 동안 고함을 지르는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도 보였다. 마차는 다시 달렸고, 잠시 후 거실에 램프 불이 켜진 듯 나무들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왓슨, 솔직히 말해서 오늘 밤 자네와 함께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야.” 점차 깊어지는 어둠 속에서 홈즈가 말했다. “내가 혹시 방해가 되나?” “아니. 자네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되지. 하지만 너무 위험해.” “그렇다면 나도 꼭 가겠어.” “정말 고마워.” “위험하다는 걸 보니, 자네는 그 방에서 내가 보지 못한 것까지 보고 왔군.” “그렇지 않아. 추리는 내가 조금 더 앞질렀을지 모르지만, 내가 본 것은 자네도 다 봤어.” “내가 본 것 중에서 색다른 것이 있다면 그 종 끈뿐이야. 솔직히 말해서 그걸 무슨 목적으로 매달아놓았는지 난 짐작조차 못 하겠어.” “환기구멍은 어때?” “방과 방 사이에 작은 구멍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진 않아. 그리고 그렇게 작은 구멍으로는 쥐새끼도 드나들기 어려워.” “나는 스토크 모란에 오기 전부터 분명 환기구멍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어째서?” “헬렌 양이 그랬잖나. 언니가 로일롯의 담배 냄새에 시달렸다고 말이야. 두 방 사이에 구멍이 없으면 저쪽 방의 담배 연기가 어떻게 이쪽 방으로 올 수 있었겠나. 작은 구멍이었기 때문에 검시관이 조사했을 때도 신경을 쓰지 않았겠지. 그래서 아마도 환기구멍이겠거니 추리했었네.” “하지만 그토록 작은 구멍으로 어떤 장치를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날짜가 이상할 정도로 맞아떨어지거든. 환기구멍이 뚫린 것과 종 끈이 장치된 것 그리고 침대에서 잠을 자던 언니가 죽은 것까지……. 이상하지 않나?” “그렇긴 한데 아직 그 상관관계를 모르겠네.” “그 침대에 좀 색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 “침대?” “방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네. 그런 식으로 고정시킨 침대를 본 일이 있나?” “없어.” “침대는 위치를 바꿀 수 없게 되어 있었다네. 그래서 언제나 환기구멍이나 종 끈이 같은 위치에 있지. 그 끈은 밧줄과 같은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다네. 종을 울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닌 건 분명하니까.” “홈즈! 자네가 말하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아. 교묘하고 무서운 범죄를 막는 데 우리가 가까스로 때를 맞추었군.” “교묘한 점에서나 무서운 점에서나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어. 의사가 나쁜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최악의 범죄자가 되지. 대담성과 지식을 겸비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왓슨, 우리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데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어쨌든 날이 밝을 때까지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겪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천천히 담배나 피우면서 하다못해 두세 시간 동안이라도 무언가 유쾌한 일을 생각해 보자고.” 9시쯤 되자 나무 사이로 새어나오던 불빛도 꺼져 저택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기나긴 두 시간이 지나 시계가 11시를 치는 순간, 창 밖으로 한 줄기 밝은 광채가 번뜩였다. “옳지, 신호 불빛이야. 가운데 창문에서 비치는 불빛이야.” 홈즈가 기운차게 일어서면서 말했다. 홈즈는 호텔을 나서며 주인에게, 지금 친구 집을 방문하러 가는데 어쩌면 자고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두운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몰아쳐 왔다. 이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밤,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는 우리를 향해 정면에서 반짝이는 노란 불빛이 등대 노릇을 해주었다. 해묵은 담은 허물어진 곳이 수리도 안 된 채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빠져 정원으로 나가 그곳을 가로질러 창문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월계수 숲 속에서 이상한 형체, 어린애 같아 보이는 무언가가 뛰어나와 손발을 버둥거리면서 풀 위에 몸을 던지는가 싶더니 재빨리 정원을 달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앗! 그것 봤어?” 내가 속삭였다. 홈즈도 나만큼 놀란 모양이었다. 내 손목을 강하게 움켜쥔 그 손에 마음의 동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조용히 웃으면서 내 귀에 속삭였다. “허, 굉장한 집이군. 지금 그것은 비비 원숭이야.” 나는 로일롯 의사가 귀여워하는 별난 애완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깜박 잊고 있었다. 표범도 있을 것이다. 언제 등 뒤에서 습격해 올지 모를 일이다. 홈즈가 하는 대로 신발을 벗고 침실에 들어갔을 때, 솔직히 말해서 ‘이제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홈즈는 소리 없이 덧문을 닫고 램프를 테이블 위에 옮겨놓더니, 방 전체를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낮에 본 그대로였다. 홈즈는 내 옆으로 와서는 손을 모아 내 귀에 바짝 대고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게 속 삭였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우리 계획은 끝장이야. 어둠 속에 앉아 있어야 해. 구멍으로 빛이 새어나가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들면 안 돼. 목숨이 달아날지도 몰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권총을 준비해. 나는 침대에 앉을 테니, 자네는 저 의자에 앉아.” 나는 권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홈즈는 미리 준비해 온 가느다란 지팡이를 침대 위에 놓고, 그 옆에 성냥과 양초를 나란히 놓았다. 그런 다음 방 안의 램프를 끄자 이내 캄캄한 어둠에 잠겨 버렸다. 그 무서웠던 밤을 평생 잊을 수 있을까. 소리 하나, 아니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밤이었다. 바로 근처에 칼날같이 신경을 곤두세운 채 홈즈가 눈을 크게 뜨고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두려움은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덧문으로 차단되어 실낱같은 불빛 한 줄기도 새어들어 오지 않는 암흑 속에서 우리는 계속 기다렸다. 밖에서는 이따금 새 울음소리가 들렸고, 한번은 창문 밖에서 길게 꼬리를 끄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 집에서 놓아기르는 표범의 울음소리였다. 15분마다 시간을 알리는 성당의 시계 소리가 멀리서 무거운 음색으로 들려왔는데, 그 15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12시를 치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1시, 2시, 3시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우리 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일어날 그 사태를 말없이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환기구멍 쪽에서 타는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찔러 왔다. 로일롯의 방에서 덮개가 있는 랜턴에 불을 붙인 것이다. 나직하게 인기척이 들리고 다시 조용해졌는데, 그 냄새는 더욱 강하게 풍겨왔다. 나는 바짝 귀를 곤두세웠다. 그렇게 30분 정도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 갑자기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그건 주전자에서 뿜어 나오는 가느다란 수증기 소리 비슷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그 소리가 들려오자, 홈즈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냥을 켜고 지팡이로 종 끈을 힘껏 쳤다. “왓슨, 봤어?” 홈즈가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홈즈가 성냥을 켰을 때 낮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들었지만, 환한 빛이 갑자기 눈을 쏘는 바람에 홈즈가 그토록 세게 때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공포와 혐오의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만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홈즈가 동작을 멈추고 환기구멍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밤의 정적을 깨고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과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비명 소리는 더욱 커졌고 온몸의 털이 쭈뼛 일어설 만큼 무서운 절규로 변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저 멀리 마을 변두리의 목사관까지도 이 절규가 들려 잠을 자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심정으로 홈즈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동안, 어느덧 절 규는 그치고 주위는 다시 본래의 정적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났어. 결국 이렇게 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몰라. 권총을 갖고 와. 로일롯 의사의 방에 가보세.” 홈즈는 심각한 표정으로 램프에 불을 붙이더니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다. 문을 두 번 노크했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는 손잡이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는 자세로 권총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기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덮개를 반쯤 올린 랜턴이 문이 절반 정도 열린 금고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테이블 옆 나무 의자에, 긴 회색 잠옷을 입은 그림스비 로일롯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발목을 드러낸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낮에 보았던 짧은 손잡이에 긴 가죽이 달린 채찍이 놓여 있었다. 로일롯은 턱을 치켜들고 천장의 한 모퉁이를 경직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마 둘레에는 갈색 얼룩점이 있는 기묘한 끈이 달라붙어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머리를 바싹 감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도 그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끈이야! 얼룩무늬 끈!” 홈즈가 속삭였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그때, 기묘한 머리장식이 움직이더니 의사의 머리카락 속에서 소름 돋는 다이아몬드 형 뱀의 머리와 부풀어 오른 목이 함께 불쑥 나타났다. “연못 독사야.” 홈즈가 소리쳤다. “인도에서도 가장 위험한 독사야. 로일롯 의사는 물린 지 10초도 안 되어서 죽었어. 폭력은 행사한 사람에게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이군. 남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사람은, 자신도 그 구덩이에 빠지는 법이야. 이 뱀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고, 헬렌 양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도록 하자고. 그런 다음에 이 사건을 주 경찰에 신고하세.” 홈즈는 죽은 사람의 무릎에서 재빨리 채찍을 주워 들고, 고리를 뱀의 목에 걸어 되도록 멀리 들어서 금고에 넣은 다음 문을 닫았다. 이것이 스토크 모란의 그림스비 로일롯 의사가 죽게 된 사건의 진상이다. 얘기가 이미 길어졌으므로, 겁을 먹은 헬렌 스토너에게 이 슬픈 사건을 대충 설명해 준 후 아침 열차로 하로 근처에 사는 이모에게 바래다 준 경위, 또 로일롯 의사가 부주의하게 위험한 애완동물과 놀다가 일어난 사고로 결론 내린 경찰의 안이한 수사 진행 따위는 더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으려 한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는 이튿날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홈즈가 설명해 주었다. “왓슨, 나는 처음에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렸어. 불충분한 자료로 추리한다는 것은 항상 위험이 따른다는 좋은 예가 되었지. 집시가 있었다는 것, 헬렌 양의 언니가 성냥 불빛으로 언뜻 본 물체를 표현한 ‘밴드’라는 말, 이 두 가지 말을 듣고 나는 완전히 그릇된 방향으로 추리했었던 거야. 다만 그 방에 있는 사람에게 닥칠 위험이 무엇이든, 그것이 창문이나 문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생각을 즉시 바꾼 점만은 자랑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그 환기구멍과 침대에 늘어져 있는 종 끈에 주목했지. 종 끈이 속임수였다는 것, 또 침대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즉시 이 끈은 무엇인가 환기구멍에서 나와 침대로 갈 때 건너가는 다리가 아닐까 하고 의심했지. 곧 뱀이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로일롯 의사가 인도에서 짐승들을 사들였다는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고, 더욱 내 추리가 옳다는 자신감을 가졌어. 어떠한 화학실험으로도 발각되지 않는 독을 사용한다는 착상은, 동양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머리 좋고 잔인한 남자에게 썩 잘 어울리지. 이러한 독은 작용이 빠르다는 것도 그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조건이었어. 작고 검은 두 개의 이빨 자국 상처를 발견한 검시관이 있다면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일 거야. 그리고 휘파람 소리도 생각해 봤어. 말할 필요도 없이, 아침까지 뱀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발각되겠지. 그리고 우유를 이용해서 되돌아오는 훈련을 시켰을 거야. 가장 적당한 시간을 택하여 그 뱀을 환기구멍으로 빠져나가게만 한다면, 틀림없이 끈을 타고 기어가 침대에 도달한다고 계산한 거지. 뱀이 방 안의 사람을 어김없이 문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희생자가 일주일 정도는 화를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물린다는 것은 확실해. 여기까지의 추리는 로일롯 의사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했어. 의자를 조사해 보고 그가 이따금 그 위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았지.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환기구멍에 손을 뻗을 필요가 있어서였겠지. 금고, 우유 접시, 고리가 달린 채찍, 이 정도만 보면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 헬렌 양이 들었다는 금속성 소리는 뱀을 금고에 넣고 급히 문을 닫았을 때 난 소리가 틀림없어. 이렇게 결론을 내린 다음 증거를 잡기 위해 내가 취한 방법은 자네가 본 대로야. 자네도 들었겠지만, 뱀의 쉭쉭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즉시 성냥을 켜고 공격했지.” “뱀은 그래서 나왔던 환기구멍으로 다시 도망갔군.” “그렇지. 그리고는 벽 저쪽의 주인을 공격한 거야. 내 지팡이에 호되게 맞았기 때문에 뱀의 본성이 되살아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문 거야. 이렇게 보면 그림스비 로일롯의 죽음에 나도 간접적이나마 책임이 있겠지만, 양심의 가책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군.”